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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식 민낯 드러난 책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 160회 작성일 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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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자조모임의 한 회원이 좋은 책이 있다고 카톡을 통해 알려왔다. 봤더니 트랜스젠더이자 자폐성 장애인이며, 사회심리학자인 데번 프라이스(Devon Price)의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Unmasking Autism)이라는 책이었다. 사실 자폐성 장애인에겐 신경전형적(비장애 중심) 세상의 기대에 맞춰지지 않으면 배제당하기 일쑤라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애 특성을 숨기는 마스킹(Masking)을 한다는 건 예전 글들에서 수도 없이 얘기했다.

나도 그런 삶의 경험이 많은지라 무슨 책인지 관심이 좀 갔었는데, 설 이후에 책을 살 형편이 돼 사서 읽어보았다. 400페이지 정도 되는 번역본이라 3~4일에 걸쳐서 읽어봤는데, 많은 부분 공감이 갔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지점들이 있었다. 그 지점들에 대해 한 번 나눠보고자 한다.

먼저 책 원본에 Autism이란 단어가 많고, 뜻이 자폐증이다 보니, 책 번역본에 ‘자폐증이 남자 아이의 장애’, ‘그가 만난 ‘고기능’ 자폐증 남아‘, ’자폐증은 로봇처럼 냉담하게 행동하는 장애로만 묘사되기 때문에‘, ’자폐증 성인‘ 등 ’자폐증‘이란 용어로 번역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자폐증은 증상이며 일종의 병인데, 병이라면 고치거나 완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폐증‘이란 게 내 삶의 경험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자폐증‘이란 정체는 자폐성 장애이며, 장애란 고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자폐증이란 말로 장애를 마치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건 모순이다. 당연, 자폐성 장애인을 차별하는 용어이나, 이런 말들이 책 번역본에 버젓이 쓰일 수 있는 것엔 우리 사회가 장애의 의료적 모델에 길들여진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폐증‘이란 용어 팽배를 부추기는 건 통계청, 의사협회의 잘못이 가장 크다. 통계청은 장애 감수성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중앙조직도에서 보면,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 밑에 통계청이 있는데, 기재부는 장애인 예산과 관련해 증액을 잘 하지 않는다. 기재부는 장애인 권리를 말 그대로 권리보단 비용으로 보는 곳이니 역시 장애 감수성이 없다. 그러다 보니 통계청이 장애 감수성이 없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으며, 이들은 통계에 자폐증이란 단어를 버젓이 쓴다.

국립국어원도 자폐증이란 단어를 버젓이 쓴다. 의사협회도 장애를 병으로 보는 시각을 갖다 보니 이들도 자폐증이란 단어를 쓴다. 하지만 2013년 아스퍼거 증후군과 자폐증을 통합해 자폐성 장애, 또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자폐증이란 단어는 사라지는 추세다. 하지만 이런 국제적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기만 한다.

따라서 ’자폐증‘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자폐성 장애‘ 또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란 말을 쓰도록, 의사협회, 통계청, 국립국어원 등에 훈련 수준의 장애인권리협약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게 필요한데, 이와 관련해 정부의 장애인권리협약을 이행하는 행동계획이 아예 마련되지 않았고, 정부는 이에 관한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우려된다.


자폐증에 대한 국립국어원 우리말 샘의 정의..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이트 캡처
한편, 책 원본에는 도입 부분에서 Autism과 관련해 신경다양성(Neurodivergence)의 형태로 보고 있지만, 4장에서는 이를 장애(Disorder)로 표현한다. Disorder는 신체 기능의 이상, 장애이며, 증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지만 신경다양성이란 증상이 아닌 독특함이자 정체성, 다양성이라 Disorder와는 서로 모순된다.

실제로 책 원본에는 Disorder란 단어가 258개, Disability란 단어가 149개 나온다. 아무래도 책 저자가 심리학자이다 보니, 장애를 의료적 관점으로 보는 것에 약간 더 많이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자폐성 장애가 다양성과 정체성의 일종임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저자는 미국인이며, 미국은 장애인권리협약에 서명했지만, 비준하진 않았다. 미국 장애인법 등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비준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선 장애인 차별이 상당하다. 그러니 미국도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해야 할 당사국일 뿐이다. 협약을 비준하고 의사, 심리학자, 정부, 국회. 법관 등을 상대로 훈련 수준으로 협약 교육을 한다면, 장애를 Disorder로 묘사하는 게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Autistic People을 신경다양인(빨간색 칠한 부분)으로 번역한 부분 ⓒ디플롯
그리고 책 번역본 19페이지에 보면 Autistic People을 ’신경다양인‘으로 번역한 부분이 보인다. 이와 관련된 ’신경다양성‘이란 단어는 뇌신경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자폐 특성, 지적 스펙트럼, ADHD, 학습장애, 사회소통장애, 성격장애 등을 생물적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이다(출처: 배제에서 수용까지(From Exclusion to Acceptance):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의 독립생활, 마틴 데커, Autistic Community and the Neurodiversity Movement, 2019년).

그렇다면 신경다양인은 신경다양성이 있는 사람으로 Autistic People인 자폐인뿐만 아니라 성격장애인, ADHD가 있는 사람, 학습장애인 등을 포함한다. 그러니 자폐인을 신경다양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며, 신경다양인 중에 자폐인이 있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자폐인을 신경다양인으로 오역했고, 이 오역엔 상당히 의도성이 있어 보인다.

신경다양성, 신경다양인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 개념이 한국 사회에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 우리 자조모임 등에서 ’신경다양성‘, ’신경다양인‘이란 개념을 알리는 활동이 활발해져야 한단 생각이 든다. 또한, 정부, 사회가 이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게 널리 쓰이도록 장애 패러다임 전환 계기를 마련하고 관련 행동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경다양성(Neurodivergence)의 일종인 ADHD를 나타내는 그림들. ⓒPixabay
다음으로 ’편의‘란 부분이 좀 걸린다. ’편의‘라고 번역한 부분 가운데 대표적으로 두 문장만 인용해보겠다.

자폐인은 다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사회가 강요하는 수치심에 도전하며, 자신에게 필요하고 제공받아야 마땅한 편의를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다(출처: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 202페이지).

로즈에 따르면 많은 자폐인(특히 여성)들이 처음엔 도움을 요청하기 부끄러워하지만, 청소부나 정리 정돈 도우미를 고용하는 것은 꼭 필요한 편의를 활용하는 일이다(출처: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 248페이지).

첫 번째 문장에서 자폐인에게 필요한 편의와 관련해선 차분하면서도 솔직하게 타인에게 자신의 장애 특성과 수치심 등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신뢰관계인 동반 및 안전한 공간 마련과 자신의 장애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상담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두 번째 문장과 관련해선 청소와 정리·정돈이 쉽지 않은 자폐성 장애인(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들인 경우, 이들의 심신 불안정 해소를 통한 정신건강 증진 차원에서 청소부 등의 편의가 필요할 수 있다.

회사에서 자폐성 장애인이 일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자폐인이 요청 가능한 구체적 편의로 책에선 회의 안건을 사전 배포하고 이를 준수하기, 작업 완료 방법에 관한 단계별 상세 지침 제공하기,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결과 또는 목표 제시하기, 공개 행사에 앞서 제공한 자료, 질문, 토론 주제 숙지하기(출처: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 300페이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청소부, 장애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상담 제공 등은 자폐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목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자폐인에겐 권리 차원인 거다. 회의 안건을 사전에 배포하는 것 등도, 자폐성 장애인이 일을 잘하고,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한 일환으로 역시 권리 차원에서 제공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편의‘는 ’형편이나 편하고 좋음‘이며,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배려란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며, 제공자의 의중에 따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뉘앙스라 시혜적이지, 권리 차원의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위의 것들은 권리 차원에서 해야 하는 것들이기에 ’편의‘란 말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Reasonable Accommodations(합리적 조정/변경)에 대한 예를 나타낸 그림.. ⓒ미국 상무부(U.S Department of Commerce)
영어 원문에는 Accommodation으로 되어 있는데, 단어 뜻은 편의다. 이와 관련해 장애인권리협약에선 Reasonable Accommodation이란 말이 있다. Reasonable Accommodation의 목적은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모든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의 향유 또는 행사를 보장하는 것이므로, 권리 차원의 말임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을 갖고, 부담을 지우지 않는 상태에서 필요하고 적절한 변경과 조정을 의미하는 게 Reasonable Accommodation이다.

하지만 편의로 번역함으로,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은 (Reasonable) Accommodation을 권리 차원이 아닌 시혜 차원으로 제공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차원으로 잘못 인식하게 된다. 이런 오역들이 결국엔 ’(합리적) 변경‘이 우리나라에서 권리로 인식되지 않는 현실을 부추기는 하나의 요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Reasonable) Accommodation을 (합리적) 변경/조정의 뜻으로 번역해 그런 요인을 줄이도록 하는 게 맞다.

합리적 변경을 편의로 번역하고, 자폐증이라는 단어가 많음은 물론, Autistic people을 신경다양인으로 오역하는 등 책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을 통해 대한민국 장애인식의 천박함과 민낯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 책 내용에 적지 않게 들어있어, 아까도 말했듯 많은 부분이 공감되는 책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후 다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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